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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논평

브렉시트, 더 불평등한 국민국가로의 회귀?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하기로 하면서, ‘브렉시트’라는 낯선 말이 모든 뉴스의 중심이 되었다. 주가가 폭락하고 여러 군데서 온갖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방송사는 긴급 좌담에, 인터넷과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도 난리가 났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지는 해라고는 하지만 영국은 명목 국내총생산 기준 세계 5-6위를 차지하는 경제대국이다. 유럽 국가 대부분을 묶은 EU가 차지하는 국제 정치, 경제의 비중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꼭 지구화, 세계화를 들먹이지 않고도 ‘극동’의 작은 나라까지 큰 영향을 받는 형편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 나머지 대부분은 혼란스럽다. 온갖 해석과 전망이 난무하지만, 명료한 것은 많지 않다. 브렉시트로 결론이 난 이유에는 이런저런 모든 이유가 다 들어있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도 ‘점’을 치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불확실성의 한복판에서도 관심은 한쪽으로 크게 쏠려 있으니, 그것은 경제다. 브렉시트에 이르게 된 경과는 물론이고, 앞으로 벌어질 사태도 대부분이 경제, 금융, 수출 이야기다. 그래 봐야 결론은 영국과 다른 나라, 그리고 세계 경제가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것이 전부지만, ‘경제주의적’ 해석은 그만큼 힘이 세다. 경제에 추가되는 것이 약간의 국제정치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미국과 영국이 국제정치 판의 ‘동반자’였으니 이도 당연한 일. 미국은 영국이 빠진 EU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위상은 어떻게 될까,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정치적 위상은 어떻게 변할까, 논란이 분분하다. 미국이나 러시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핫이슈’는 EU 자체의 존립이다. 탈퇴 도미노 현상과 EU의 붕괴(또는 무력화)가 현실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서리풀 논평

세 살 쿠르디의 죽음과 한국의 난민 문제

  터키의 한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 된 시리아 아이, 쿠르디. 9월 3일 국내 언론에 보도된 쿠르디의 사진은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붉은 색 셔츠의 작은 남자아이는 파도에 떠밀려온 인형처럼 해변 모래에 엎드려 있었다. 쿠르디의 죽음(정확하게는 몇 장의 사진)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다. 유럽 여러 나라가 난민 수용 정책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토록 완강하던 몇 나라(예를 들어 영국)는 벌써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미디어와 언론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드라마가 된 타자의 고통, 그것을 중계하는 현대의 미디어, 그리고 분노와 연민조차 ‘외주’를 통해야 하는 ‘상호 수동’의 현실이 끔찍하다. 쿠르디의 죽음에 분노하는 것(정확하게는 분노한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분노를 관찰하거나 동참하는 것)은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의 녹음된 웃음과 얼마나 다를까. “고된 일에 지친 상태로 TV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어도 나는 코미디 쇼가 주는 긴장 완화를 느낀다. 마치 TV가 나를 대신해서 웃어주는 것처럼.”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40쪽) ‘상호 수동’을 벗어나지 못해도 그 현실조차 참혹하다. 오늘 이 시각에도 수만의 난민이(그리고 이미 죽어간 영혼들이) 유럽의 바다와 육지를 떠돈다. 유엔난민기구의 통계를 보면 2015년 6월에만 4만 3천여 명의 난민이 바다를 거쳐 유럽에 도착했다고 한다(바로가기). 사태의 원인과 결과는 여기에서 자세하게 살피지 않는다. 다만, 유럽에서는 현재의 난민 사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인도주의적 위기라고 인식하는 분위기다. 영국은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유대인 아이를 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