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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논평

개헌, 과정이 더 중요하다

대통령이 내년 지방 선거 때 개헌을 하자고 제안한 후 개헌 논의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국회 개헌특위가 내년 2월까지 개정안을 만든다고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회는  분과별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시민토론회까지 개최하는 중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누구든 첫째 관심은 새로운 헌법에 무슨 내용이 담길 것인가 하는 것. 우리는 이미 2014년 10월에 사회권적 기본권을 강화하고, 그런 맥락에서 ‘건강권’을 적극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기본 방향을 주장했다(서리플 논평 ‘새로운 헌법의 조건’ 바로 가기). “우리는 개헌 논의를 통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다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강권은 상세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국가의 의무도 당연히 따라간다….(중략)… 소득, 교육, 고용, 노동조건, 환경, 주거…기본권마다 더 자세한 권리의 목록을 포함해야 하고,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조건과 환경이 바뀌었으니, 권리의 ‘최저’ ‘기본’ 또는 ‘적정’의 수준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 의견은 지금도 유효하다. 마침 국가인권위원회가 비슷한 취지에서 ‘기본권 보장 강화를 위한 헌법개정안’을 만들고 며칠 전 토론에 붙였다(국가인권위원 보도자료 바로 가기). 일단 방향을 이렇게 잡은 것을 환영하고 더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기본권 강화가 개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논의는 또 있다. 지난주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제주에서 열린 ‘제주인권회의’에서도 ‘개헌과 인권’이 핵심 주제의 하나로 다루어졌다(한국인권재단 공지사항 바로 가기, ‘한국 사회 인권을 말한다…제주인권회의 열려’ 기사 바로 가기). 인권과 기본권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이라야 시민의 삶이 실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공통된 인식이 논의 배경이 되었으리라. 헌법 개정안은 지금도 ‘구성’되는 중인만큼 결과를 속단할 수 없다. 다만, 현재 논의 정도와 수준을 고려할 때 기본권이 얼마나 강화될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기본권 중에서도 이른바 사회적 기본권(또는 ‘사회권’), 그리고 우리의 관심인 건강권은 더 불확실하다. 이 논평은 주로 건강권에 관심을 두지만, 다른 사회적 기본권도 근본에서는 ‘오십보 백보’가 아닌가 싶다. 사회적 기본권으로서 건강권이 크게 진전되기 어렵다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개정안에서도 드러난다. 이 개정안은 건강권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모든 사람은 건강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질병 예방과 보건의료체계의 향상 등 구체적인 내용은 법률로 정한다.” 개정안이 기존 헌법 조항(“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것은 분명하나, ‘건강을 향유할 권리’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다. 질병 예방과 보건의료체계의 향상 등을 법률로 미루었으니, 국가의 책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한계가 명확하다. 국회 개헌특위가 마련한 개정안 초안도 건강권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하기 어렵다. 특위의 분과에서 만들었다는 초안의 건강권 조항은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적절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국민의 건강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 초안은 건강권을 건강이 아니라 보건, 의료 서비스를 보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국가의 책무는 ‘의무’가 아니라 ‘노력’하는 것에(전통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조항만으로는 새로운 헌법도 건강권을 보장하는 실질적인 지침 노릇을 하기 어렵다. 시민사회단체가 제안하는 건강권은 훨씬 적극적이다. 예를 들어 참여연대가 중심이 된 ‘개헌과 사회권 토론회’(2017년 5월 24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초안이 제안되었다. ① 국내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정신적 및 육체적 건강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개인의 경제적 부담능력에 따라 건강권이 침해되지 않는 수준의 적절하고 합리적인 의료보장 및 공공 보건서비스 및 관련 제도를 실시할 의무를 진다. ②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책임 하에 제1항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공공의료를 확충하여야 한다. ③ 국가는 질병 및 사고를 당한 생활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생명 또는 신체의 중대한 위험에 직면한 긴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적절한 의료보장을 실시하여야 한다. 분명히 나아진 것이나 우리는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건강권은 보건의료 서비스나 의료보장제도에 대한 권리를 넘어 누구나 건강한 상태(결과)를 누릴 수 있는 권리여야 한다. 최근 ‘사회적 결정요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잘 알려진 만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소득, 교육, 노동, 고용 등도 권리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사회적 기본권에 ‘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다음 글을 참조할 것. ‘개헌과 건강권’ 바로 가기). 국가의 책무도 더 적극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권에 대한 국가 책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샌드라 프레드먼의 주장에 동의한다. 권리를 모두 충족하지 못해도 또는 그 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의무가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그것이 의무를 소홀히 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즉, 권리가 충족되는지와 무관하게 (국가의) 의무는 존재한다(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조효제 옮김. <인권의 대전환>, 교양인 펴냄). 적극적으로 건강권을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지금은 건강권이 선언 수준 이상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인정한다. 헌법 개정과 그 방향이 상황과 맥락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면, 건강권을 보장하는 수준은 시민과 대중이 이해하고 참여하며 논의하는 것 이상으로 ‘돌출’할 수 없다. ‘사회적 이해’의 수준을 고려하면 건강권(나아가 사회적 기본권)에 대한 강한 지지와 옹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취약한 사회적 이해 또는 기반 때문에라도 내용을 넘어 헌법 개정의 ‘과정’을 다시 꺼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부 집단과 정치인이 아니라, 대중과 시민이 개헌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2016년 7월 18일 <서리풀 논평> ‘시민이 이끄는 개헌 논의를’ 바로 가기). “우리는 개헌이 목표로 하는 헌법 내용보다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중략)…누가 개헌을 이끌고 과정을 지배하는 주체인가? 형식적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는 뜻보다는 헌법이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논의가 민주적이고 참여적일 때, 결과로서의 헌법은 비로소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시민이 만들어가고 또 만들어내는 헌법, ‘시민의 헌법’이 필요하다.” 과정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거듭 주장한다. 어떤 형식과 절차든 기본권, 사회적 기본권(사회권), 건강권을 배우고 논의하며 요구하는 것이 더 좋은 헌법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시민회의, 만민공동회, 시민행동, 그 무엇이든 좋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토론하고 요구해야 한다. 농민, 어민, 비정규 노동자, 아동,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어 담지 않고 어떻게 개헌을 논의할 수 있단 말인가? 건강권도 마찬가지다. 삼성반도체 건강 피해 노동자, 핵발전소 주변 주민, 홈리스와 쪽방 거주자, 비정규 노동자, 섬에 사는 노인이 건강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지 못한 채 건강권을 규정할 수 있을까? 건강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따질 수 있을까? 더 많이 참여하고 어떤 소리라도 내고 듣는 민주적 개헌이 필요하다. 시간이 모자라면? 꼭 내년 4월에 개헌을 해야 할 급박한 이유가 있는가? 필요하면 시기를 늦추고 차분하게 그러나 치밀하게 논의해야 더 좋은 헌법을 가질 수 있다.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장담할 수 없으니, 더 신중해야 한다.

이슈페이퍼

[시민건강이슈 2017-06] 지금,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국제보건을 비판한다

지난 연말을 뜨겁게 달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국제개발원조는 핫 이슈였습니다. 비빔밥과 K-Pop, 산전초음파를 패키지로 제공하는 코리아에이드 같은 정체불명의 프로젝트가 시행되었을 때, 국제보건에 종사하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중에서야 그 실체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황당해하고 분노했습니다. 사실,이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해 온 활동가, 연구자들도 화가 나겠지만, 누군가의 돈벌이 도구이자 정치적 선전물의 대상으로 이용당한 현지 주민들에게 끼친 해악과 존엄성 훼손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국제보건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악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국제보건 현장에서 오랜 동안 활동해온 오충현 선생이 그동안의 공부, 활동, 성찰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국제보건을 비판한다’는 이슈페이퍼를 작성해주었습니다. 글을 통해서 국제보건의 개념을 정리해 보고, ‘우리’는 왜 국제보건을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국제보건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국제보건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전략, 실행, 성과관리, 평가, 교육, 일자리 그리고 연구 측면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안합니다. 이번 이슈페이퍼를 통해 활발한 후속 논의와 토론이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그동안 시민건강증진연구소의 삼임/비상임 연구원이 전담해왔던 이슈페이퍼 집필 방식을 변경하여, 이제는 회원/비회원이 직접 필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양한 주제와 견해가 공론의 장에서 논의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러한 집필 방식의 변경으로 인해 [시민건강이슈]에 담긴 주장이 시민건강증진연구소의 ‘공식’ 견해와는 다를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앞으로 회원 여부에 관계없이, 제기하고 싶은

서리풀 논평

정신건강복지법을 ‘공공보건의료’ 강화의 기회로

  과거의 ‘정신보건법’을 대신한 ‘정신건강복지법’이 일 년의 준비를 거쳐 5월 30일부터 시행된다. 1995년 정신보건법이 처음 만들어졌으니, 20여 년 만에 법이 바뀌는 셈이다. 새로운 이름 그대로, 정신질환과 정신장애를 가진 이들의 복지가 증진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제목에서, 또는 이 정도에서 이 <논평> 읽기를 멈추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어서, 왠지 무겁고 답답한 주제여서, 전문가나 관심을 가질 일이어서 등, 여러 이유로 정신질환은 ‘배제’되어 왔다. 지금 그 생각을 잠시 멈추고, 약간의 시간을 내주기 부탁한다. 어떤 질병이나 사회문제인들 그렇지 않으랴. 관심과 논의가 환자와 보호자, 전문가, 공무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마땅히 사회적, 공적 과제가 되어야 하는 많은 것들이 개인과 시장에 맡겨진다. 어떤 건강문제 또는 사회문제와 비교해도 정신질환과 정신장애는 숨어들고 또 숨겨지기 쉽다.   이제라도 더 드러내고 밝혀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정신장애는 생각보다 많고 중요하다. 보건복지부와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정신장애의 평생유병률은 14.4%(니코틴, 알코올 사용장애 제외)에 이르고, 추정 환자 수는 368만 명을 넘는다 (바로가기). 입원 중인 환자 수와 진료비도 엄청나다. (건강보험이 아닌) ‘의료급여’ 대상자에 한정해도 2016년 한 해 약 3만 8천 명이 ‘조현병, 분열형 및 망상성 장애’로 입원했고 진료비는 4천억 원을 넘었다. 조현병 진료에 쓰는 건강보험 진료비만 한 해 3천억 원에 가깝지만, 그나마 환자 수(50만 명)의 20% 정도만 치료를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가기).   정신질환의 특성상 인권을 둘러싼 논란은 중요한 질병 ‘부담’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다. 새로운

서리풀 논평

‘낙태죄’를 넘어 ‘재생산’에 대한 권리로

  오늘 논평의 주제는 우리 연구소(사단법인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안에서도 논쟁이 끝나지 않은 사안이다. 바로 낙태에 대한 권리와 낙태죄. 논의 중인 일에 논평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 문제 삼을 수 있지만, 결정이 필요한 일을 언제까지 논의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어려운 부분은 그대로 남겨두더라도 우리의 판단을 밝히는 쪽이 옳을 것이다.   먼저, ‘불법’ 인공임신중절(보통 낙태라고 부른다) 수술을 더 강하게 처벌하려는 정부의 조치는 철회하는 것이 맞다. ‘죽은’ 규정을 살려내 낙태를 줄이겠다는 방침이 왜 나왔는지 따져봐야 하겠으나 그건 좀 미룬다. ‘죄’라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여성과 의사만 처벌하는 것이 맞는 일인가, 이런 질문도 다음 기회에 따지기로 한다.   정부 방침을 반대하는 첫째 이유는 정책으로서 효과를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효과는커녕 더 많은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안전하지 못한 불법 시술로 많은 여성이 생명과 건강을 해칠 것이 뻔하다. 불법 시술의 비용은 더 비싸지고 해외원정 낙태도 증가할 것이다. 사문화된 낙태금지법을 그냥 두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법을 바꾸거나 폐지하는 것이 단순 입법기술의 문제가 아닌 다음에야 사회적 판단이 필요하고, 합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치를 반영하는 논쟁을 피할 수 없다. 낙태와 낙태의 권리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낙태의 권리에 대해 우리의 (잠정적) 판단을 말하기 전에 강조할 것이 있다. 권리의 내용 이전에 그 내용을 생각하는 새로운 ‘과정’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논의와 논쟁을 해 나가는 접근과

서리풀 논평

거제와 울산의 고통 – 개인, 지역, 그리고 국가

  이번 주에는 추석 연휴가 들어 있다. 고용노동부가 나서서 경제5단체에 협조공문을 보내 휴가를 늘리라고 했다니, 일주일이 넘는 연휴를 누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이 줄고 휴식이 늘어나는 것은 찬성,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추석 명절이 ‘지역’과 무관하지 않다면, 여러 지역의 경제적 어려움은 ‘직격탄’ 꼴이라 해야 한다. 모두가 아는 그대로, 지금 남해안 벨트는 쑥대밭이다. 먼저 조선업의 구조조정에서 시작하여 한진해운 사태, 그리고 콜레라까지 겹쳤다. 이 지역 주민이 겪는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명절을 앞두고 ‘고통’을 말하는 것은 추상이나 가능성이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조선업 붕괴의 파장이 가장 크고 파괴적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이번 추석은 전혀 명절답지 않을 것이다. 실업과 소득감소, 소비 위축, 지역 경제의 부진이 차례대로 나타나는 중이니까.   전체 응답자 중 216명(55.4%)이 실질 소득이 줄었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 중 44.1%는 임금이 줄었다고 답했고 25.2% 상여금 삭감, 38.8%는 기타 수당이 삭감됐다고 답했다. “시급이 20% 줄었습니다. 상여금도 20% 정도 줄었습니다. 기타 수당이 20% 줄었고 노동시간도 20%도 줄었습니다. 실질소득을 더 많이 줄어서 30% 정도 줄었습니다. (기사 바로가기)   거제시 실업급여 신청자는 지난 5월 2449명으로 1년전 5월 1596명보다 853명 늘었다….지난 5월 예금은행 수신액은 1조 6159억원으로 지난해 9월보다 4.2%(716억원)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저축은행 대출액은 650억원으로 21%(115억원) 늘었다. 신용협동기구 대출액도 3조4628억원에서 3조6705억원으로 5.99%(2077억원) 증가했다.(기사 바로가기)   이런 사정은 금방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콜레라의 충격은 조금

서리풀 논평

‘교차보조’의 악용, 전기료와 건강보험료의 경우

  계절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으니 이 여름의 폭염은 곧 누그러질 것이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전기료 누진제 시비는 한참 더 갈 것으로 보인다. 겨울에도 전기료 걱정을 해야 한다지 않는가. 방향은 다를 터이나, 이 논란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 여름은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기료 누진제가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것을 이해한다. 더 쉽게 더 싸게 전기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자칫 ‘전기중독’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이뿐인가, 더 많은 전기 수요는 지속 가능성이 떨어지는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더 지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것이다. 이건 곤란하다. 누진제를 없애거나 완화하면 누가 가장 큰 혜택을 보는가도 문제다. 1만 원의 요금에도 벌벌 떠는 서민의 부담은 당연히 줄여야 하지만, 요금제를 잘못 설계하면 효과는 엉뚱한 곳으로 돌아간다. 아예 에어컨도 없는 가정이 얼마나 혜택을 볼 수 있겠는가. 한국전력을 비난하는 것도 마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다. 요금 결정권은 누가 쥐고 있는데, ‘도덕적 해이’를 빌미로 삼아 한쪽에서는 전기 민영화 논의를 부채질한다. 전기를 ‘시장’에 맡기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몰고 갈 참인가.   그래도 이번의 전기료 논란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중요한 기회다. 단지 지금의 전기요금 구조나 생산원가가 아니라, 사회적 자원의 의미와 배분의 원리를 묻자. 이 시대 에너지의 사회적, 공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에너지의 사용과 비용 부담에는 어떤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이 시대 에너지는 삶의 질이자 생명과 직결된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서리풀 논평

시민이 이끄는 개헌 논의를

17일인 제헌절이 막 지났다. 제대로 공휴일 취급을 받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헌법’이 크게 의미가 없어서인지, 별 ‘임팩트’가 없다. 의례적인 언론 보도와 특집 기사가 있지만, 공론장에 도달하는 데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이런 조용함은 헌법의 현실과 그것의 전사회적 기초를 동시에 반영하는 것일 터, 꼭 올해만의 일은 아니다. 되돌아봐도 꽤 오랜 기간 헌법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기억이 희미하다. 지금의 헌법체계가 안정적으로 잘 작동하기 때문이라면 크게 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지만, 그보다는 관심과 논의의 ‘효능’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들어 여러 경로로 개헌 이야기가 나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런 상황은 걱정스럽다. 그냥 지나간 제헌절이 미약한 관심과 치우친 논의 공간을 상징한다면, 새롭게 헌법을 논의하더라도 투입-과정-결과가 모두 ‘그들’만의 것이 될 공산이 크다. 누가 무엇을 논의하든 정략의 산물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헌법을 논의하는 시민의 힘을 키워야 한다. 헌법 논의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문제는 으레 나오는 형식적, 일반적 과제가 아니다. 현행 헌법은 진작부터 평범한 시민의 삶과 행복을 잘 보호하는 ‘가이드’나 ‘스폰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사드 배치가 그렇고, 성적 소수자 차별이 그러하며, 건강보험료 부과 논란도 마찬가지. 개인정보 유출과 통신 감청은 또 어떤가.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헌법은 무엇을 해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고 또 잘 모르겠다. 헌법의 소외, 그리고 헌법으로부터의 소외다. 지금까지 말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새로운 헌법이 포함해야 할 가치와 목표 몇 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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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 배제와 차별을 넘으려면

  “정신건강도 건강권이다”라는 제목으로 <서리풀 논평>을 쓴 때가 2015년 4월 (바로가기),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외국에서 큰 사고가 일어난 것이 계기가 되었으니, 다들 독일 저먼윙스 여객기 추락 사고를 기억할 것이다. 우울증 병력을 가진 조종사가 일부러 비행기를 추락시킨 것으로 밝혀졌고, 그 때문에 그의 정신병력이 논란이 되었다.   오늘 다시 정신건강을 짚는 것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 때문이다. 정신건강, 그 중에서도 만성 정신질환이 연이어 관심 대상이 되고, 안타깝게도 사회의 반응과 논의, 대응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만큼 지체 현상을 보이는 일이 또 있을까 생각하면, 역시 정신보건은 ‘마이너리티’를 면치 못한다.   먼저, 그 유명한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가해자는 조현병으로 진단을 받았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았다. 경찰은 정신질환을 사건의 동기로 결론지었고,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서 ‘안전’을 위해 정신질환자를 ‘관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직도 이런 형편인가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신질환자를 찾기 위해 체크리스트를 개발하겠다는 계획도 황당하지만, 당장은 ‘우범’ 정신질환자에 대한 ‘행정입원’ 추진 방침이 더 큰 문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나서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제동을 걸 정도다(바로가기). 용인정신병원 사태를 계기로 다시 드러난 의료급여 만성 정신질환자의 치료와 처우 문제도 전혀 가볍지 않다(라프르시안 기사 바로가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고질적 문제지만, 병원 노조가 설명한 의료급여 환자의 차별은 다시 놀랍고도 아프다.   “건강보험 환자가 입원한 병동에는 24시간 온수가 공급되지만 의료급여 환자 입원병동에는 아침, 저녁 1시간씩 제한적으로 온수가 공급됐다.

서리풀 논평

불가능한 권리(건강권)를 꿈꾸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데도 ‘새해’라고 부르는 것이 꼭 좋을까. 갑자기 새해를 따질 일이 아니라, 매일 새로워진다는 뜻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옳다는 주장이다. 그의 말대로 새해조차 상품이 된 것처럼 보인다. 물건값이나 공공요금 인상, 다시 시작하는 일 년의 계약, ‘2016’이라는 숫자가 박힌 수첩,…혹시 세상과 우리의 삶은 일 년 단위로 쪼개져 팔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을 허구라 할 수는 없다. 시간과 진보 모두 근대 이후에 구성된 개념이라는 말이 옳겠지만, 그리하여 상당 부분 상품이 된 것이 맞겠지만,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은 그 개념에 영향을 받고 스스로 삶을 다시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 모든 반론을 무릅쓰고 새해는 실재하는 ‘리얼리티’다.   이번 <서리풀 논평>으로 2016년 한 해를 다짐하는 계기로 삼는다. 다만, 우리는 그 무엇이라도 새로움을 보태야 상품을 넘어 실재하는 진보의 뜻이 살아난다고 생각한다. 더 넓고 정확한 이해와 새로운 실천이 ‘우일신’하려는 핵심이다. 다짐을 말하기 전에 정치사회적 환경 한 가지를 먼저 지적해야 하겠다. 많은 사람이 예상하는 대로, 2016년 전반기는 현실 정치, 좁게 보면 총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좋은 싫든 거부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한다.   객관적 환경이라 했지만 희망과 요구가 왜 없을까. 우리는 정당을 매개로 한 현실 정치가 제대로 ‘정치적’이어야 함을 늘 주장해 왔다. 먼저, 현실 정치는 이념과 지향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가

서리풀 논평

세계에이즈의 날에 생각하는 인권

  이번 주 화요일, 12월 1일은 ‘세계에이즈의 날’이다. 1988년부터 기념했으니 역사가 30년이 다 되어간다. 어떤 날인가? 국제적으로 보건문제를 총괄하는 세계보건기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날에 들어간다. 유엔의 에이즈 특별기구인 ‘유엔에이즈(UNAIDS)’는 말할 것도 없다. 국제기구뿐 아니라 대부분 나라가 이 날을 챙긴다. 전세계 어느 나라가 에이즈를 별것 아닌 문제로 여길 수 있을까. 치료법이 개선되어 질병 부담이 가벼워졌다고는 하지만 에이즈는 아직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나라 형편이 어떻든, 세계에이즈의 날은 유용한 제도이자 도구다.   다른 나라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한국은 ‘갈라파고스’인 셈이다. 정부 안에서 에이즈를 총괄하는 질병관리본부부터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의 ‘세계에이즈의 날’ 항목은 최종 수정일이 올해 8월에 멈춰있고, 기념일을 나타낸 그림은 2012년 것이다 (바로가기). 상위 조직인 보건복지부 소식에도 특별한 것이 없다. 그나마 지방 정부가 체면치레를 할 모양이다. 곳곳의 보건소가 예방과 인식 개선 캠페인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어떤 사업을 얼마나 제대로 하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두 따질 형편은 아니나, 공공보건조직이 하는 일인 만큼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지키는 공동행동으로 짐작한다. 질병관리본부의 정보와 자료(바로가기)를 따를 것이니, 충분히 의미 있는 활동으로 평가한다. 꼭 올해만 아니라, 한국에서 에이즈는 크게 주목받았던 적이 드물다. 어느 모로 보나 관심과 논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것이 못된다. 그동안 에이즈의 대유행을 피했고, 문제를 ‘소수화’, ‘부분화’, ‘특수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치료할 수 있는 질병, 그냥 보통의 만성질환이 되었다고 한다. 예상대로 된다면, 관심은 더